복수동은 대전시 서구 유등천 좌안에 있다. 아주 오래전 본말, 똘건너, 뗏짐못골 신계 등 자연마을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삼익 목화 아파트 및 초록마을아파트와 같은 아파트 단지와 근린 생활지구가 들어서 옛 전통마을은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복수동의 의미를 알아 보자
복수라는 말을 이름에 관해 많은 문헌은 '복수소'에서 그 유래를 설명한다.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고요. "촌개소, 복수소: 모두 유성현 동쪽 23리에 있다."
조선 초기가지 존재했던 행정구역 구분이다. '소'에는 농민이 아니라 수공업자가 살았다. 복수소에서 어떤 것을 만들어 냈을지 궁금했으나 확인하지는 못한다.
근데, 복수동이라는 이름이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을 거라 추정할 수는 있지만 마찬가지로 '복수'라는 이름이 어디에 기원을 두는지는 여전히 모른다. 더군다나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복수에 수자가 물 수 인데, 최근 행정명 기록은 지킬 수를 사용한다. 복 자는 똑같이 복 복자를 쓴다. 어쨌든, 복수라는 이름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더군다나 답사한 마을은 복수동 안에서도 작은 '섬마을'이다. 마을이 들어선 곳은 과거의 복수소가 있던 시절에는 마을 땔감을 제공했던 산이었을 게다. 이곳을 따로 부르는 이름도 없다. 마을을 형성했을 즈음 택시를 타면 군인주택으로 가자고 하여 그 마을에 내려주었단다. 지금은 배달하는 사람들 사이에 277로 불린다. 이곳 주소가 277번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골목과 계단으로 이어진 주택 단지
마을은 혜천대학교에서 배재대학교 쪽으로 이어지는 혜천로를 따라가다 오른편이다. 대전의 계백로 위에 놓은 불티구름다리를 건너기 전, 정림동으로 빠지는 구봉로 즈음이다. 이곳에서 마을은 오른쪽으로 올려다보아야 한다. 야트막한 산 정상부를 평평하게 정리한 후 집을 지었다. 포털사이트에서 지도 검색을 하면 '복수동 1 주택 재개발구역'이라고 나온단다. 조합 설립 이후 시간이 많이 흘러 재개발이 이루어질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도 느껴지지만 조합 게시판에서는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보여준다.
한쪽 꼭짓점이 잘려나간 삼각형 형태인 마을 주변을 빙 둘러 널찍한 도로가 지난다. 복수북로와 복수서로, 그리고 혜천로다. 그래서 이곳 주미은 마치 섬 같다고 말한다. 산을 깎아 만든 주택지답게 마을 곳곳은 계단으로 이어진다. 이 마을에서 깊은 인상을 주는 건 그래서 골목과 계단이다.
반듯하게 낸 골목은 각 복수 1길부터 복수 5길까지 이어지고 각 골목과 골목이 만든 구역 안에 주택이 들어섰다. 횡으로 연결된 골목은 곳곳에 계단으로 이어진다. 계단은 콘크리트가 일반적이지만 철도 침목을 활용한 곳도 보인다.
마을이 들어선 산은 그리 높지 않았나 보다. 이 마을이 산꼭대기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그렇다고 정상부를 많이 파내려 낮춘 것도 아닌 듯싶다. 그래도 왠지 하늘과 무척 가까운 마을이라는 생각이 든다. 골목에서 시선을 조금만 멀리 두면 다른 장애물 없이 곧바로 하늘이 보여서 그런 모양이다. 도심 한가운데서는 애써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아야 하는 수고로움이 필요하다면 이 마을에서는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집집마다 수령이 적잖은 감나무가 있고 이번 가을에 무수히 많은 감잎이 떨어졌을 텐데, 골목은 깊은 인상을 줄 만큼 깔끔해 정갈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정원수로 가장 많은 것이 감나무이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복수 1길로 올라서는 계단 초입에는 멋들어진 소나무가 여러 그루 자란다. 그 밑에는 닭장이 놓여 있다. 닭이 꼬꼬거리는 소리가 정겹다. 복수북로 길가에는 잘 자란 버드나무도 보이고 마을 가운데는 은행나무와 단풍나무, 마을 가 쪽으로 아카시나무도 여러 그루다. 정갈한 마을 골목에는 인기척도 드물다. 평일 낮이라는 것이 이유지만 아파트 단지가 아닌 개인주택 단지라는 것도 이유일 게다. 이 고요함이 이 마을을 더욱 도심 속 섬처럼 만든다.

군인 가족에게 불하한 '터전'
재개발조합 사무실이 들어선 곳은 노인회관이다. 한쪽 골목 끝에 ㅇㅆ다. 시골마을에 갔을 때나 경로당에 찾아가서 도심 마을에는 흔한 경우가 아닌데, 도무지 골목에서 사람을 만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것도 일부러 찾아간 것은 아니다. 키 작은 은행나무에 이끌려 들어선 골목에서 막다른 지점에 다다랐고 그곳에서 경로당 건물을 만난 것뿐이다.
점심을 함께 먹었는지 주방에서는 설거지가 한창이었고 할아버지 방 옆에 붙어있는 할머니 방에는 식사를 마친 왕언니 할머니들이 모여 있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들어오는 동생들에게 '고생했다'라고 말을 건네는 모습까지 딱 시골 경로당 풍경이다. 정겨움다. "아이고, 여기 처음 들어왔을 때는 얼마나 살기 힘들었는데, 도로나 골목은 포장도 안되어 있지. 수도 시설도 없어서 군부대에서 물을 길어다 주는 걸로 썼으니까. 아주 말도 못 하지."
그것이 대략 40년 전이다. 1970년을 전후해 이곳에 집이 하나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대전광역시에서 택지개발을 진행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군 소속 토지였고 군인을 대상으로 불하했다. 그래서 이 마을 택시기사들은 군인주택이라 불었던 모양이다. 불하할 당시 대부분의 땅을 50평씩 나누었고, 축대를 쌓은 곳 일부가 60~76평대 택지였다. 지금도 당시 불하받았던 군인 출신 가족이 살고 있고 다른 동네에 비해 주민 중 공무원 비중이 높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마을 회관에서 만난 김영임(90) 할머니도 40년 전 이곳에 50평 땅을 40만 원 정도 주고 사서 들어와 지금껏 살고 있는 토박이였다. 포장을 치고 군인을 상대로 밥도 해서 팔고 술도 팔았던 오씨네가 이곳 원주민 격이었다. 먼저 세상을 떠난 김영임 할머니 남편은 당시 서부경찰서에 자리 있던 공병대 상사였다. 김영임 할머니보다 7년 정도 늦게 들어온 할머니는 평당 3만 원을 주었다니 제법 땅 값이 올랐다.
군인 가족이 주로 모여 살던 이 주택단지는 한 때 학생들 자취, 하숙촌으로 그 기능을 했다. 동방여고와 혜천대학교 때문이다. 서천군과 청양군 등 당시 충남 일대에서 유학 온 고등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세놓는 방도 비쌌고 그나마 없어서 못 놓을 정도였다. 가계 수입에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그 뒤로는 혜천대학교 학생들이 방을 구해 들어왔다. 비교적 최근까지다. 그 흔적은 '아카데미 하우스'라는 무척 이국적인 이름을 단 원룸 건물에서도 확일할 수 있었다. 그나마 동방여고가 이전하고 혜천대학교에서 기숙사를 지으면서 자취와 하숙 공간을 제공했던 마을 기능도 스 소용을 다했다.
"언젠가 젊은이들이 와서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여기에 왜 아파트를 지으려고 하냐 그러대. 하늘도 이렇게 이쁘고 공기도 맑고 좋은데, 모르긴 몰라도 여기 아파트 지으면 대전에서 경관은 아마 제일 좋을 거야."
어지간히 이야기가 끝나자 할머니들은 다시 일상적인 대화로 돌아간다. 한 이불 속에 여럿이 다리를 집어넣고 말이다. 김영임 씨가 기르던 고양이를 키우기가 힘들어 다른 사람에게 주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나가 보니 얘가 어떻게 왔는지 돌아와서는 빤히 쳐다보는데 어찌나 이뻤는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주에였다.
골목 구석구석 평화로운 햇살이 가득
경로당에서 나와 마을 동쪽 골목으로 진입한다. 마을 가에는 어김없이 차량 진입금지 표지판이 붙어있다. 초행길인 사람들이 모르고 돌진했다가 마을 아래로 뚝 떨어진 사고가 틀림없이 있었던 모양이다. 오랜 시간을 다하고 잘려 나간 나무 둥치가 곳곳에 보인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힘들겠다는 얘기에 '금방 녹는다'라고 말하더니 정말 그렇지 싶다. 막힘없이 골목 구석구석에 햇살이 평화롭다.
재개발조합 계단에 붙어있던 조감도가 머리를 스친다.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이 솟은 아파트 단지와 그 사이에 설치하는 수변공원과 조경시설 등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작업한 느낌을 팍팍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지금 눈앞에 펼쳐진 마을 모습 위로 겹친다. 휑하니 씁쓸하다. 아파트가 들어서면 햇볕은 삐죽이 올라선 콘크리트 건축물에 막혀 쓸쓸한 그림자를 드리울 게 분명하다. 지금처럼 곳곳에 평화롭게 내리쬐는 태양빛을 더는 보지 못할 것이다.